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이승만]] == ||[[파일:0C542194-01DC-4877-8AB3-CCD1BE9F4C88.jpg|weight=500&height=300]]|| || 장제스&[[쑹메이링]] 부부와 [[이승만]]. [[1953년]] [[이승만]]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 장제스는 자신의 후원을 받던 김구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지지했고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47년]] 이승만이 [[난징]]을 방문하면서 이승만·장제스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장제스는 이승만의 기백과 반공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49년 [[국부천대]]라는 상황 변화가 생기면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관계도 바뀌어 나갔다. 장제스는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최초로 방문한 외국의 정상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요청에 따라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반공노선을 지향하였고 각각 공산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다 미국을 압박하여 지원을 이끌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진해회담 당시 장제스는 수도인 [[난징시|남경]]을 공산군에 내주고(1949년 4월) 광저우에 가 있을 때였는데, 대륙 수복을 위해 제주도에 중국의 해공군 기지를 세울 수 있을지를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국공내전]]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이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제스는 1949년 10월 1일 베이징(당시는 베이핑)에서 열리는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식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중화민국 국군의 전투기들의 행동반경이 짧았기 때문에 부산을 경유하여 베이징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부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거절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http://www.csytv.com/pinlv/dushi/xinwen/2016-08-15/694136.html|#]] [* 이에 대한 내용이 중국 영화인 [[건국대업]]에서 묘사된다.] [[6.25 전쟁]] 당시에도 장제스는 한국에 중화민국 국군을 파견하여 중공군과 싸우려고 했으나 했으나, 미국이 이를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1월에 이승만은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반공연맹, 집단안보체제 수립 구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으며 정치적 연대는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